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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관심, 낭만적 편집증 그리고 사랑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두 번째 읽으면서 공감했던 몇 구절이 있습니다. 그걸 기록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 특히 내가 더 많이 그리고 열렬히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 내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실 것 같습니다. 짝사랑을 하고 계시다면 때에 따라 위로를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저에겐 사이다처럼 시원한 청량감을 느끼게 해주었구요.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사랑이냐 단순한 망상이냐? p.26

구애를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의심들이 한 가지 중심적인 질문으로 환원되고, 구애자는 판결을 기다리는 범죄자처럼 떨면서 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그(녀)가 나를 바라는 것일까, 바라지 않는 것일까? p.27

순수와 공모의 중간에 걸려 있는 클로이의 모든 행동에는 나를 미치게 만드는 의미들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문장 끄트머리에서, 그녀의 웃음의 입꼬리에서 유혹의 흔적을 찾아낸 것 같은데, 맞나? 아니면 나의 욕망이 순수의 얼굴에 투사된 것뿐일까? p.31

욕망 때문에 나는 실마리들을 악착같이 쫓는 사냥꾼이 되었다. 모든 것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낭만적 편집증 환자가 되었다. p.33

공유된 경험이라는 기초 위에서 친밀성은 자라날 기회를 얻는다. 그저 이따금씩 식사를 함께 하면서 생긴 우정은 결코 여행이나 대학에서 형성된 우정의 깊이를 따라갈 수 없다. 정글에서 사자에 놀란 사람들은, 사자에게 잡아먹히지만 않는다면, 그들이 본 것에 의해 단단히 결속될 것이다. p.138

의미론적으로 볼 때 사랑과 관심이 거의 맞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중략)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 관심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더 풍부하게 느끼게 해준다는 것이다. p.144

"문제를 말하면 진짜로 문제가 생겨."로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뭐가 나타날지 두려워 나는 감히 생각해볼 수가 없었다. 생각의 자유를 실행에 옮기는 데는 악마들과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겁에 질린 정신은 방황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 편집증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상태였다. 버클리 주교는, 그리고 훨씬 뒤에 태어난 클로이는 눈을 감으면 바깥 세계는 꿈이나 다름없이 비현실이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닌게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착각의 힘이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진실을 정면으로 보지 않으려는 충동, 생각만 하지 않으면 불쾌한 진실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 p.193



사랑과 관심이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다는 보통의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항상 관심이 가거든요. 되게 사소한 관심이라도 표현하고 싶게 되구요.

관심이라는 맥락에서, 아래의 문장을 보면 사랑과 관심이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으면, 관계가 정리된 거다.

위 문장을 보자마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사랑과 관심을 맞바꾸어 쓸 수 있'기 때문이지 싶었습니다. 대상이 누구이건, 남자건 여자건 사물이건 사상이건, 더 이상 궁금하지 않으면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지속되기 어려울 겁니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감정의 진행여부는 논할 필요도 없겠죠. 궁금증과 관심이 대상을 향한 내 마음의 크기인 것 같습니다.

문득,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던 대상에 관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관계 회복 혹은 재설정. 황경신 작가님의 <착각>이라는 글에서 이러한 일이 잘 표현된 것 같습니다. 기호가 매번 바뀌고, 관심사가 다양해지는게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분일 수도 있겠어요. 


평생 내가 할 일은 이거라고 생각했는데

저것도 꽤 괜찮다고 생각하는 요즘

돌아보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많은 착각을 했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싫어했던 것들

그런 이유가 있을 거라 믿었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했던 것들

변하고 사라지는 걸 보면 

꼭 그렇지도 않아

평생 싫어할 것 같았던 분홍색을 어느 날 용서하게 된다거나

평생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무서운 영화를 어느 날 보게 된다거나

아주 오래갈 줄 알았던 친구와 문득 소원해지는 일

아주 잊은 줄 알았던 친구와 문득 다시 만나게 되는 일

다 내버려두었는데

많은 것이 변해가고 있어


부정하지 않겠어요

후회하지 않겠어요.

                                                                -황경신, 착각-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으며 새롭게 접한 표현이 있습니다. 

낭만적 편집증, 낭만적 운명론, 낭만적 테러리즘, 마르크스 주의, 라이트모티브


알랭 드 보통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한 해석과 폭넓은 시각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느꼈던 여러 감정을 다른 시각에서 분석하고 설명해주는데, 미처 지각하지 못했던 사실을 밝혀주는 것 같아요. 탐정처럼. 속 시원히 그리고 명료하게.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여러권 가지고 있는데, 다른 책들도 두번 째 독서를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